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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명성산 억새밭.
ⓒ 김홍의
10월 14일 아침. 눈을 뜨니 하늘이 맑았다. 선선한 공기가 기분 좋게 스쳤다. 오늘 정한 여행지는 집에서 제법 먼 경기도 포천. 잠시 망설였다.
갈까, 말까.
하지만 고민이 길어질수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하지 못하면 내일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 마음먹었을 때 움직이지 않으면 내일은 또 다른 일정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미루다 보면 결국 하지 못하는 일도 많다.
▲ 맑게 갠 하늘 아래 고요히 펼쳐진 산정호수를 둘러보고 명성산으로 향한다.
ⓒ 김홍의
그래서 출발했다. 명성산 억새꽃축제를 앞둔 포천 산정호수 상동주차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산정호수를 한 바퀴 둘러보고 명성산 억새밭으로 향하는 산행을 시작했다. 명성산을 오르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명성산, 그 이름에 담긴 슬픔
▲ 명성산의 산자락을 뒤덮은 억새 너머로 가을 산맥이 겹겹이 펼쳐진다.
ⓒ 김홍의
명성산은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과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의 경계에 걸쳐 있는 높이 922.6m의 산이다. 산정호수를 끼고 있으며, 산속에는 억새가 무성하다.
명성산이라는 이름에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포천시에 따르면, 통일신라의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 산을 지나 금강산으로 향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름에 얽힌 전설을 떠올리면 산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산정호수와 명성산의 자연경관을 활용한 '산정호수 명성산 억새꽃 축제'는 1997년부터 매년 10월에 열린다. 오늘날 명성산은 가을이면 은빛 억새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는 산이 되었다. 특히 축제 기간에는 주차장이 혼잡할 수 있어 가급적 오전 9시 이전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억새밭은 차를 타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상동주차장에서 출발해 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르고, 한참을 걸어야 비로소 은빛 억새 군락을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만나기 위해서는 조금의 수고가 필요한 모양이다.
계곡을 따라, 기억을 따라
강시
▲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 사이로 바위와 계곡이 가을 산길을 이룬다.
ⓒ 김홍의
억새밭으로 가는 등산로 가운데 이번에는 1코스를 택했다. 상동주차장에서 출발해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지나 억새밭을 거쳐 정상으로 이어지는, 총 6.6km에 2시간 40분가량 걸리는 길이다.
상동주차장에 차를 대고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니 이내 현수막이 보였다. 주택을 개조한 상가단지를 지나자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선선했던 공기는 오르면 오를수록 제법 더워졌다. 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 위로 단풍이 벌써 곱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철제다리를 건너고 다시 산길을 오르자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등룡폭포였다.
▲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며 도착한 순간 산위를 가득 채운 억새들
ⓒ 김홍의
산길을 오르며 지나온 시간을 떠올렸다. 포천에 대한 기억 하나는 2020년 6월 전국여행 중 이동갈비를 먹었던 일이다. 숙소를 고민하다 허름한 여관에서 묵기로 했는데, 그날 밤 비가 내렸다. 텐트를 치지 않길 잘했다 싶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포천은 행복했던 유월의 여행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사이 나는 조금 더 성숙해졌고,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자신을 믿고 성큼성큼 내디뎠던 시간들을 떠올리자 문득 숨이 차올랐다. 산을 오르느라 차오른 숨인지,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느라 차오른 숨인지 알 수 없었다.
'올해의 가을은 올해만 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걸었다. 조금씩 억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길가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던 억새는 어느 순간 산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상을 향해 걷는 길은 돌이 많았다. 발목을 삐끗하기 쉬운 구간도 있어 등산이 익숙하지 않다면 바닥을 잘 살피며 걷고 가급적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역광에 빛나는 억새, 그 앞에서
▲ 아름다운 풍경에 이르는 길은 때로 힘겹지만, 그 과정 또한 여행의 일부다.
ⓒ 김홍의
두 시간 남짓 걸었을까. 마침내 억새꽃 군락지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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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부풀어 오른 억새가 역광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산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결코 쉽지 않은 산행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감동으로 가득 찼다.
사실 나는 등산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려올 산을 왜 오르나, 하는 다소 이성적인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힘들게 올라야만 마주할 수 있는 감동이 있다는 것은 안다.
산이 억새밭을 감싸 안은 모습을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힘들게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올라와 보는 것은 달랐다. 사진은 억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산길을 걸으며 흘린 땀과 거친 숨, 그 시간을 지나 마주한 감동까지는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여행은 때때로 직접 마주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준다.
▲ 끝까지 오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나에게 맞는 걸음으로 풍경을 만나는 것도 여행이다.
ⓒ 김홍의
하지만 이번 산행은 여기까지였다. 억새군락지가 명성산 정상인 줄 알았는데, 정상까지는 아직 2km가량 더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체력에 부담을 느껴 과감히 발길을 돌렸다.
내일을 꿈꾸고 준비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현실에서 양보해야 하는 부분도 필요한 법이다. 끝까지 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성과 감성,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나에게 맞는 타협。을 찾는 일. 그것이 이번 산행이 내게 남긴 교훈이었는지도 모른다.
느린 우체통, 그리고 내게 전하는 이야기
▲ 계절은 짧지만, 그 순간 마주한 아름다운 기록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 김홍의
하산길에 작은 쉼터와 느린 우체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일 년 후에 편지를 받을 수 있는 느린 우체통을 종종 만난다. 그럴 때면 나도 가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일 년 뒤 내가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그때까지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적어보는 것이다.
막연한 꿈보다는 지금부터 하나씩 실천하면 이룰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한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오늘의 나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일 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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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져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산을 오르고 있을까.
▲ 눈부신 햇살 아래 억새 길을 따라 오늘의 걸음을 고요히 잇는다.
ⓒ 김홍의
산을 오르며 지나온 시간을 떠올렸다면, 이제는 앞으로의 시간을 생각해볼 차례였다. 산을 오르는 동안 여러 번 숨이 찼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르막에서는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지나온 길을 돌아본 뒤 내가 가야 할 길을 다시 걸어가면 된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곱씹어본다.
'현실에서 살고, 과거에서 배우며, 미래를 계획한다.'
나는 느린 우체통을 뒤로 하고 다시 산을 내려왔다. 오늘의 억새가 내일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기를 바라면서.
억새는 계절이 지나면 다시 고개를 숙일 것이다. 단풍도 결국 낙엽이 되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 계절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고, 그 순간에만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산을 오르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도 억새꽃이 피는 가을날의 명성산은 한 번쯤 걸어볼 만하다. 힘겨운 오르막 끝에서 만나는 풍경은 걸어온 만큼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오늘의 풍경이 보이고, 다시 바라보면 앞으로 걸어갈 길이 보인다.
ⓒ 김홍의
- 명성산 억새꽃군락지: 경기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 일대
- 내비게이션: '명성산억새꽃축제' 또는 '산정호수상동주차장' 검색
- 등산 코스(1코스): 상동주차장 → 비선폭포(600m·10분) → 등룡폭포(800m·15분) → 억새꽃군락지(2.5km·55분) → 정상(2.7km·1시간 20분). 편도 총 6.6km, 약 2시간 40분
- 산정호수 명성산 억새꽃 축제: 1997년부터 매년 10월 개최(2026년은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 주차료: 소형 1,000원 · 중형 5,000원 · 대형 10,000원 (1시간 이내 출차 시 무료)
- 억새 개화 시기: 일반적으로 10월부터 11월 초
산정호수: 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산정호수는 '산속의 우물'이라는 이름 뜻처럼 명성산과 망봉산 등 울창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는 경기 북부의 대표적인 휴양 명소다. 3.2km에 달하는 수변 데크 둘레길과 수상레저, 조각공원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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