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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준진영살
댓글 0건 조회 385회 작성일 26-08-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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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허버드 주한미대사와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이 2002년 11월 27일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고를 일으킨 두 미군 병사가 무죄 판결을 받은 즉시 출국하고, 부시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지 않는 형태의 '대리 사과'는 대선을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에서 역풍을 불러 일으켰고, 좌파는 이를 대선에 적극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조선일보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가 며칠 전 서울에 부임하면서 1년 6개월 넘게 이어졌던 주한 미국대사 공백 사태가 마침내 해소됐습니다. 이제는 ‘한국계 최초의 여성 주한 미국대사’라는 상징성을 가진 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스틸 대사는 미국 연방하원의원을 지내며 북한 핵 문제와 한미동맹, 중국의 탈북민 강제북송 등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내온 인물입니다. 남편 숀 스틸 변호사가 미 공화당의 유력 인사로 스틸 부부는 트럼프 대통령과 긴밀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미국 대사의 성공 여부는 이것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한미 동맹에 반발하는 일부 좌파가 언제든 반미 감정을 정치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만큼, 한국 사회의 정서를 얼마나 잘 읽고, 예상치 못한 정치적 파고를 넘느냐가 중요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내리는 신속한 정치적 판단에 대사의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9년 이후 9명의 역대 주한 미대사 사회부 기자로 일하다가 1999년 정치부 발령을 받은 후 9명의 주한 미국대사를 가까이에서 취재하며 지켜봤습니다. 스티븐 보즈워스-토마스 허바드-크리스토퍼 힐-알렉산더 버시바우-캐슬린 스티븐스-성 김-마크 리퍼트-해리 해리스-필립 골드버그가 그들입니다. 좌파 진영의 반발속에 입국한 미셸 스틸 신임 주한미국대사가 부임 다음날인 7월 31일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X(옛 트위터)에 게시했다. 그는 “오늘 세종대왕 동상을 지나며 한국의 뛰어난 혁신과 리더십의 유산을 다시금 떠올렸다. 앞으로의 여정이 기대된다”고 했다. 릴게임 강시 보즈워스는 한국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로, 2001년 2월 퇴임 후에도 오바마 행정부에서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맡아 활동했습니다. 2016년 77세의 나이로 비교적 일찍 별세했습니다. 크리스토퍼 힐은 인터넷에 ‘카페 USA’를 열어 한국 국민과 직접 대화를 처음 시도,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대중적으로 한국 국민에게 다가가려 한 첫 주한미대사로 국무부 차관보로 영전한 후 북핵 6자회담의 수석대표로 활동했습니다. 평화봉사단 출신으로 충남 예산중학교에서 활동했던 캐슬린 스티븐스는 뛰어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공공 외교’ 분야에서 돋보였습니다. 성 김 대사는 첫 한국계 미국 대사라는 장。을 잘 살렸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한미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두산 베어스’ 야구단의 열성적인 팬으로 기억되는 마크 리퍼트 대사는 2015년 끔찍한 테러를 당한 후에도 한미동맹과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강조한 대사로 각인돼 있습니다. 반면 한국 사회의 반미 정서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험난한 시기를 보낸 대사를 꼽으라면 단연 토머스 허바드 대사입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도 2008년 좌파가 주도한 미국산 소고기 촛불 집회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허바드 대사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동아시아 전문가 허바드 대사 2001년 7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허바드는 미 국무부의 대표적인 동아시아 전문가였습니다. 경험 많고 노련한(seasoned) 외교관이었습니다. 국무부에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제를 오래 다뤘고, 필리핀 대사를 거쳐 한국에 부임했습니다. 제네바 합의에도 관여, 한국 사정도 잘 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워싱턴에서는 “서울에 가장 적합한 외교관”이라는 기대 속에 부임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보수적인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진보 성향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겹친 시기였습니다. 미국에서는 9·11 테러 이후 이에 대한 ‘복수 전쟁’이 시작됐고, 북한은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의혹으로 다시 핵 문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인터넷바다이야기 . 한미동맹도 잇달아 진보 정부가 출범하며 새로운 시험대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발생한 효순·미선 사건입니다. 훈련 중이던 미군 제2사단 소속 장갑차가 좁은 도로를 지나던 중학생 신효순·심미선 양을 치어 숨지게 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었습니다. 주한미군이 캠프 외부에서 훈련할 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함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탓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고 직후의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한국 사회 전체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거리마다 붉은 악마의 응원 물결이 이어졌고, 국민들의 관심은 축구대표팀의 선전에 집중됐습니다. 어린 여학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은 즉각 보도됐지만, 곧바로 대규모 반미 시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법적인 문제로만 생각한 미국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이 이 사건을 가볍게 다룬 것은 아닙니다. 허바드 대사는 사고 직후 여러 차례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도 밝혔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허바드 대사와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은 사고 자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법적 절차에 따라 처리하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미군 병사들이 훈련 중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에 한미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에 따라 미국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이 법적으로 정당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사고를 낸 운전병과 관제병의 신병을 한국 측에 넘기지 않았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협정에 따른 절차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은 이를 한국의 사법 주권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50여 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만큼 전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이 사건이 한국 정치와 사회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는 예상했어야 했습니다. 미국은 법적인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데, 한국은 ‘리걸 마인드’가 여전히 약한 나라입니다 모바일 바다이야기거북이 . 법적인 사과를 해도 진정성이 있느냐고 묻는 문화가 여전합니다. 미국은 이 사건 10년 전인 1992년 발생한 윤금이 사건을 염두에 뒀어야 하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1992년 10월 경기도 동두천에서 기지촌 여성 윤금이 씨가 주한미군 병사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군 이병 케네스 리 마클은 범행 후 검거됐는데, 당시 이 사건의 참혹한 범행 수법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윤금이 사건은 주한미군 범죄와 SOFA 개정 필요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시민단체와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미군 범죄에 대한 엄정한 처벌과 SOFA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바 있습니다. 2002년 효순 미선 사건 당시 한미 양국 정부 관계자들은 이 사건이 16대 대선 국면에서 정치적 이슈가 될 가능성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대선 직전 나온 ‘무죄 판결’ 2002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노무현 캠프와 좌파 진영은 두 여중생의 죽음을 둘러싼 국민적 슬픔과 분노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태의 결정적인 순간은 2002년 11월에 찾아 왔습니다. 주한미군 군사법원은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에게 잇달아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주한미군 7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이 무죄 평결을 내림에 따라 나온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즉각 출국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공무 수행과 관련한 법률적 판단이었지만 한국 사회에는 전혀 다른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두 여중생이 죽었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급속히 퍼졌습니다. 광화문을 비롯한 서울 도심에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과 시민단체 중심이던 집회는 。차 전국으로 확산됐고, 반미 시위는 12월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허바드 대사는 뒤늦게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사건 10년 후인 2012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습니다. “한국인과 미국인이 ‘사과’를 수용하는 틀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나도 백악관도 잘 몰랐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때 누군가 법적 처벌을 받거나 사퇴하면서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 주에 하편이 계속됩니다> 뛰어난 한국어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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