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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와 여행안내서, 미디어를 통해 자주 보게 되는 국가유산은 이미 상식처럼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시선을 돌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경상남도에만 모두 41건의 무형유산이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이름과 내용, 그것을 지켜온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지역 유산을 조명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고, 그때마다 '기록의 필요성'과 '계승의 위기'가 이야기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관심은 쉽게 흩어진다. 이 기획은 단순히 지역 유산을 나열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지역의 시간과 감각 그리고 그것을 오늘까지 이어온 사람들의 현재를 차분히 따라가며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일이다.
황금 들녘을 콤바인이 가로지른다. 고개 숙인 벼가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알곡과 분리된 볏짚이 쏟아져 나온다. 가을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농촌 풍경이다. 올해도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논배미가 하루가 다르게 비워지고 있다. 경남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허리를 굽힌 채 한 손으로 벼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낫을 놀렸다. 몇 날 며칠을 수확에 매달려야 했던 그 시절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수확이 끝난 들녘에는 짚가리가 자리를 차지했다. 짚가리는 대표적인 농촌 경관이었다. 과거에는 벼 이삭을 털어 낸 볏짚을 초가집의 이엉 재료에서 우마의 사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농촌에 기계가 보급되고 축산업이 발달하면서 볏짚의 보관과 활용은 실용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들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료로 쓰기 위해 비닐로 감싼 곤포 사일리지다. 이제는 짚가리라는 용어조차 낯설다.
선조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농요
경남도 무형유산 '함안농요'를 들여다보기에 앞서 농요 특징과 의미부터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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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농경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농업노동요(농요)는 선조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농요는 지역별로 특색을 보였으며, 종류도 다양하고 풍부했다. 농사에 따른 소리는 크게 논농사소리와 밭농사소리로 나눌 수 있는데, 전국적으로 논농사소리의 비중이 컸다. 함안농요도 논농사소리다.
농요는 논갈이, 논 삶기, 씨뿌리기, 모찌기, 모심기, 논매기, 벼 베기, 볏단 나르기, 벼 훑기, 벼 타작하기, 검불 날리기 등 농사일마다 불렸다. 소리 안에 한 해 농사 과정이 담겨 있었다. 이 중 가장 많이 불린 소리가 땡볕 아래에서 잡초를 뽑을 때 낸 '논매기소리'다. 여름철 논매기는 한 해 농사를 좌우하는 과정이었다. 선조들은 모를 심고 약 20일이 지나면 초벌매기를 했고, 이후 두벌·세벌매기를 이어갔다. 논매는 소리는 마을마다 2~3종, 많게는 4~5종에 이르렀다. 전국적으로도 200종 이상 확인되고 있다.
오늘날 논매기 풍경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제초제가 등장하고 작물 재배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두레를 조직해 논을 맬 때 주거니 받거니 내던 소리는 사라졌다. 백중(음력 7월 15일) 무렵 세벌매기가 끝나면 하던 호미씻이나 백중놀이 등도 자취를 감췄다. 하루 동안 마음 놓고 먹고 놀며 고단함을 달랠 필요가 없어진 까닭이다.
다행히 들녘에서 불리던 소리는 무형유산 지정 등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오늘날 전승되는 농요에는 농사일의 과정과 선조들의 삶이 묻어난다. 공동체 정신과 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으며, 중노동 무게를 덜어주는 신명이 녹아 있다. 함안농요도 마찬가지다.
소리 안에 한 해 농사 과정 담겨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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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불쌍하다~ 농부님네~(선창) / 상~ 사~ 디~이~ 여~어~(후창) / 동해동창~ 돋은 해가~ / 상~ 사~ 디~이~ 여~어~ / 일락서산~ 떨어져도~ / 상~ 사~ 디~이~ 여~어~ / 어느 시간 일손 놓고~ / 상~ 사~ 디~이~ 여~어~ / 우리 농부들 이럭저럭 하우다~ / 상~ 사~ 디~이~ 여~어~ / 죽어지면은 어이 하리~ / 상~ 사~ 디~이~ 여~어~ / 애닯고도~ 설움진다~ / 상~ 사~ 디~이~ 여~어~ (후략)"(논매기 상사소리 마당 중 세벌논매기 상사소리)
함안농요는 보리타작소리, 모찌기소리, 모심기소리, 논매기 상사소리, 백중(용신제·함안 거북줄땡기기) 등 다섯 마당으로 구성된다. 계절에 따른 농사일에 소리와 놀이가 집약됐다. 지난 3일 함안군 법수면 악양둔치 실제농사체험장에서 열린 '제9회 함안농요 가실놀이 한마당' 현장에서는 함안농요 다섯 마당에 이어 벼 베기와 타작까지 한 해 농사가 재현됐다. 이날 제20회 함안농요 정기 발표회를 비롯해 제27회 아라가야풍물연구회 정기 발표회도 진행됐다.
1980~90년대 지역 행사에서 단편적으로만 선보였던 함안농요는 2000년대 들어 아라가야풍물연구회에 의해 체계화됐다. 회원들은 기존 자료를 취합하고 지역을 돌며 농요를 채록했다. 이와 함께 명맥이 끊겼던 함안 거북줄땡기기를 복원하면서 2007년 첫 함안농요 복원발표회를 개최했다. 이후 지금까지 정기 발표회를 열고 있다. 함안농요는 2016년 경남도 무형유산에 지정됐다.
함안에서 전승되는 논매기소리는 후렴인 '상사디여'를 따 상사소리라고 부른다. 제초제 보급으로 논매기소리가 사라지는 가운데 연구회는 채록한 3가지 소리를 아시(초벌)논매기, 두(두벌)논매기, 만(세벌)논매기로 나눠 전승하고 있다.
"천하 부자~ 석순~이도~(선창) / 상~ 사~ 디~이~ 여~어~(후창) / 재물 두고서~ 죽었다네~ / 상~ 사~ 디~이~ 여~어~ / 천하 빈자~ 번단~이도~ / 상~ 사~ 디~이~ 여~어~ / 굶어 가면서~ 살았~다네~ / 상~ 사~ 디~이~ 여~어~ / 땀은 나서 옷은 붙고~ / 상~ 사~ 디~이~ 여~어~ / 배는 고파서 등에 붙고~ / 상~ 사~ 디~이~ 여~어~ / 입은 말라서 불붙었다~ / 상~ 사~ 디~이~ 여~어~ / 이렁 저렁~ 다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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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 사~ 디~이~ 여~어~ / 다 매였네~"(논매기 상사소리 마당 중 세벌논매기 상사소리)
지역마다 각양각색 모습으로 전승
이날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금과들소리' 초청 공연도 펼쳐졌다. 금과들소리는 순창군 금과면에서 전승되는 논농사소리로, 물 품는 소리, 모심는 소리, 논매는 소리, 장원질 소리 등으로 이뤄진다. 이 지역은 순창 내 다른 지역과 달리 네벌매기를 한다. 논매는 소리도 '문열가'로 시작해 '연꽃타령', '담담서름타령', '오호타령', '방애타령', '오헤소리', '사호소리' 등 다양하다.
함안농요가 한반도 동부(경상도·강원도·함경도) 어법인 메나리토리에 기반한다면, 금과들소리는 전라도 어법인 육자배기토리가 주를 이룬다. 호남 동부의 산간 지역 농요로, 특히 음계와 선법이 판소리의 우조·계면조와 일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두 패로 나뉘어 가창하는 방식도 독특하다. 이 지역의 논매는 소리도 금과들소리 공개 행사 등을 통해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앞패) 연꽃일~레 연꽃~일레 광~주~ 경향에나 방죽이나 연꽃~일레(선창) / 얼씨구나 정저리사 절씨구나 정저리싸 음~ 나니나 좋~을씨고(후창) / (뒷패) 연꽃일~레 연꽃~일레 광~주~ 경향에나 방죽이나 연꽃~일레 / 얼씨구나 정저리사 절씨구나 정저리싸 음~ 나니나 좋~을씨고"(금과들소리 논매는 소리 중 '연꽃타령')
함안농요 정기 발표회가 끝나고 벼 베기와 타작 등 체험 마당이 펼쳐진다. 체험에 참여한 아이들은 알곡이 찬 벼를 만져보고 한 움큼 쥔다. 눈망울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탈곡기로 타작할 때는 남녀노소 없이 발을 놀리며 가을걷이의 기쁨을 누린다. 이 순간만큼은 콤바인이 대신할 수 없는 농사의 손맛과 흥취가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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